태그 : STS

언어의 중요성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명명'의 중요성.
세미나 첫 시간에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 논고 (맞나? 아무튼 언어와 관련된 이야기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연과학을 공부한 후 철학으로 방향을 튼 천재 철학자로 일컬어지는데, 살아 생전 자신이 했던 이야기와 정 반대되는 이야기로 사상을 완전히 바꾼 사람이다. 이 때문에 전기 비트겐슈타인, 후기 비트겐슈타인으로 나뉘어지는데, 난 이를 잘 모르므로 그가 전기에 어떤 사상을 후기에 어떤 사상을 논했는지 잘 모른다. 알아보려고 노력했는데 이해하기 좀 난해해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알아보기로;;;
다시 세미나로 돌아가서, 정확히 첫 시간에 비트겐슈타인 이야기를 했던 것은 아니고 그의 철학을 이야기하며 과학사회학자들이 사회적 함의를 논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나저나 대체 비트겐슈타인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 의문 투성이었는데, 아.. 꽤나 중요하구나. 시간이 조금 흐르고 깨달았다. 비트겐슈타인도 공부해야겠구먼 T-T

광우병의 질병유발인자로 알려진 프리온(Prion)의 명명에 관련된 과학사회학 세미나가 있었다. 와! 일단 단백질 이야기 나오니까 무지 반갑고, 게다가 구조적으로 중요한 프리온이니까 더욱 더 반가웠다. (내가 그래도 단백질 결정학 좀 했다고 단백질 이야기 나오면 친정 온 느낌이랄까-_-) 하지만, 그의 기작이 중요했던 건 아니고, 광우병 연구에 있어서 유발인자와 관련된 과학자들의 인식 및 연구 방향 변화를 이야기하며 Self-referentiality (자기지시성)를 논했는데, 여기서 다시 한 번 명명의 중요성이 나왔다. 오~
과학에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면 해당 연구자의 업적을 기리거나 과거 연구자를 회상하는 의미에서 사람 이름이나 지명 등을 붙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은데 이 때에 아무 이름이나 붙이는 게 아니다. 광우병 유발인자 같은 경우, 그 정확한 매커니즘이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정체조차 모호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정체를 알기 전까지 명명하지 않기로 일종의 암묵적 동의를 하였다. 하지만 뭔가 부르긴 해야 하니까 그저 "agent" 정도로 불러왔던 것. 그러나 그러한 금기를 깨고 과감히 "Prion"이라는 이름을 붙인 과학자가 있었으니, 이는 후에 이 업적으로 노벨상까지 받았다.
광우병 유발인자로 의심되는 녀석에 여러가지 실험을 해보니, 이 녀석 정체가 DNA는 아닌 것 같고 단백질인 거 같다. 하지만 단백질은 아무런 유전정보를 들고 있지 않아 다른 세포에 들어갔을 때 복제나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대체 어떻게 발병하는냐가 최대 관건. 하지만 일단 이 녀석이 병을 일으키는 건 확실하니까 이름을 "proteinaceous infectious virion" (감염성 단백질)의 줄임말인 "Prion"으로 명명했던 거다. 그러나 기존의 감염성이 있는 바이러스는 자신의 DNA를 세포에 주입하여 자기 자신을 복제시켜 병을 일으키는데, Prion은 DNA가 아닌 단백질이므로 감염성에 대해 설명할 근거가 없는 일종의 가설로 이름을 지어낸 것이었다. 이후, 많은 연구를 통해서 구조가 변형된 Prion이 다른 정상 Prion의 구조를 변화시켜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는데, 사실 이 때는 처음 명명할 때의 Prion과는 다른 성질로 밝혀진 거나 마찬가지. 그렇다면 우리는 Prion을 다시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걸까?
광우병 유발인자 (Prion)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Prion만을 분리하여 정상 쥐에 넣었지만 발병이 되지 않더라는 실험 결과가 나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는데, Prion 내에 어딘가에 DNA가 있다는 가설이 나온 것이다. (단백질에 둘러싸인 DNA, 이것이 바로 바이러스 아닌가) 이리 되면 Prion은 더이상 단백질이 아닌 바이러스로 분류되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름을 계속 Prion으로 가야 할 것인가?
아직도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명명은 꽤나 중요한 주제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부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고 있지만 나도 아직 인식론과 실재론에 대해 잘 몰라서 더 이상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다 T-T)

과학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재밌는 거 또 한 가지는, 내가 연구하는 과학자였을 때는 별 생각 없이 밤새 하던 일들이 과학사회학자들에게는 주목할만한 일이고 그들끼리의 의미 부여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하는 와중에도 과학자들은 열심히 광우병 연구에 매진하고 있을 것이고... :)

글이 좀 두서가 없네;
담 번엔 그래도 내가 좀 아는 단백질 결정학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다. (과거도 회상할 겸;)



by jewel | 2009/07/18 00:34 | └ speak | 트랙백 | 덧글(3)

심오한 네트워킹의 세계

과학사회학 (STS)과 관련한 나의 굉장히 러프(rough)한 감상.

쿤의 혁명에서 시작하여 (그 이전에도 있겠지만 일단 나의 지식이 쿤의 혁명에서 시작하므로)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은 깨어지고, 과학이 추구하는 '진리'는 저 멀리로 떠나 버렸다. 이 와중에 형성된 것이 '사회구성주의'로 결국 과학은 객관적 사실과 합리적 사고가 아닌 사회적 협의에 의해 도출되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과학자들도 일단 사회에 속해 있으므로 그들도 사회의 일부분이며 그들의 사고방식은 어려서부터 길들여 온 사회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과학자들이 내리는 합리적 판단에는 바로 '사회'가 녹아들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 이는 비슷한 지역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학파가 몰리는 경우를 보아도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수많은 다양한 과학자들이 (서로 다른 사회적 기반(태생부터 교육등을 모두 포함)을 가진) 다양한 곳에서 비슷한 연구 결과를 내며 하나의 의견을 모으는 일은 사회구성주의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으며 과거의 실재론 혹은 실재하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점을 쉽게 버릴 수 없다. 이와의 융합을 시도한 것이 ANT (Actor/Actant Network Theory, 행위자 연결망 이론)이다.
사실 ANT 이론이 이 둘의 융합을 시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ANT는 '자연'과 '사회'의 구분을 허물며 둘을 별개로 생각하지 말 것을 주문하며, 더 나아가서 과학 혹은 과학연구 행위에 있어서 인간 뿐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도 있으며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를 구분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이에 따라 나온 용어가 바로 actant로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를 모두 포괄하는 hybrid word이다. ANT에서는 각각의 actant가 network으로 연결되며 가장 많은 actant와 network을 형성하는 행위자가 일종의 권력을 가지며 이를 의무통과점 (Obligatory Passage Point)라고 명명한다. 이 때에 network를 이루는 행위를 'translation'으로 설명하고 있다.

ANT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몇 가지 이론들이 더 나오는데 이 중 하나가 바로 Social worlds이다. actant들은 하나의 society에 속해있지 않으며 다양한 social worlds에 속해 있고 이들은 OPP하나와만 network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끼리도 어느정도 network을 형성한다. 이를 설명하면서 나온 개념이 바로 boundary object인데 모든 actant가 하나의 이해관계로 연결된 것이 아닌 boundary object라는 비교적 느슨한 개념으로 엮여 있으며 그렇기에 전체적인 network는 느슨하며 유동성을 가지면서도 국소적으로는 tight한 연결망을 가져갈 수 있다. 또한 OPP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network을 형성하는 actant는 일종의 PP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서 질문.
1. ANT에서는 서로 다른 actant의 다양한 network를 인정하지 않는가?
2. social worlds에서는 권위를 갖는 actant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 스스로 OPP가 아니지만 PP 혹은 network을 많이 설명하면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인가? 혹은 boundary object의 형성을 잘 할수록 권력을 갖게 되는가?
3. 다시 ANT에서 network은 저절로 형성되는가? 혹은 OPP가 열심히 형성하고 다니는 건가? 이미 결과가 나온 현상을 ANT로 설명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진행중인 과학 스스로가 ANT에 대입하면서 길을 찾아갈 수도 있는가?

일단 오늘의 이해는 여기까지. 개념이 잡힐 듯 하면서도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왕... 또한 이들을 방법론적으로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지는 아직도 아리송하다.
라투어 아저씨랑 대화가 필요해...



by jewel | 2009/07/14 23:56 | └ speak | 트랙백 | 덧글(4)

과학사회학, 이론과 실천사이

과학사회학을 조금 공부하면서 내가 느낀 점을 그대로 표현해 준 글.
그동안 과학사회학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그 무엇보다 사회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야 하는 과학사회학이 다소 사회와 동떨어져 상아탑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학문'으로서의 과학사회학도 흥미로웠지만, 처음 생각했던 계기와 너무 달라서 계속해서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심화되었다. 그러던 중,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글을 만나 조금은 힘을 얻게 되었다.

* 아래의 글은 과학사회학 세미나 시간에 사용한 발제문으로 Brian Martin의 "과학비판, 아카데미즘에 빠지다"를 요약한 글이다. 나만의 언어로 새로 써야 함이 옳으나 이보다 더 명확하게 쓰기가 어려울 것 같아 Brian Martin의 도움을 받았다.
사실 이 글은 1993년에 쓰여진 글로 이후 학계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일단 내 공부의 초석이 되는 글이기에 읽으면서 너무 기뻤고 즐겁게 정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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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사회학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과학을 비판하는 사회운동으로 출발하였다. 급진과학 운동의 일환인 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영국 모임(BSSRS; British Society for Social Responsibility in Science)에서는 ‘민중을 위한 과학’이라는 이름의 잡지도 발간하며 운동을 이끌었다. 이 모임에는 과학자들과 더불어 비과학자들도 고루 섞여 있었다. 당시 과학 비판은 사회 비판의 일환이었으며 특히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강조하였으며 제국주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 전쟁, 인종주의, 억압 등에서 과학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이와 더불어 페미니스트 과학 비판도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여성보건 운동과 페미니스트 의료 비판도 함께 발달하였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시작으로 제리 라베츠, 배리 반스, 데이빗 블루어, 마이클 멀케이 등의 저술들이 뒤를 이으며 사회적 영향에 대한 과학 비판은 점차 고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에 영향을 미치는 과학지식의 연구라는 초기의 목표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면서 과학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고립되어 갔다. 과학 활동에 대한 이론이 정교화되면서 과학자와 활동가들이 그것을 접할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다.

    과학 사회학에 대해 영어권 지역에서는 ‘과학의 사회적 연구’, ‘과학기술과 인간 가치’ 등의 학술지나 주요 연구자들의 저서, 역사나 사회학 쪽 학술지에 실리는 관련 논문 들로 대표되는 학술적 활동이 중심에 놓여 있다. 과학 비판에 대한 전문적 활동의 많은 부분은 급진적 비판자들의 통찰을 받아들여 이를 아카데믹하고 깔끔한 틀 속에서 다시 이론화하며 그 결과로 나타난 지적 영역에 내개해 있는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많은 급진과학 활동가들은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하며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노동운동, 환경운동, 반전평화운동, 여성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을 통해 활동하고 있다. 학계에 있는 과학분석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목표 중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수업, 전문적인 학술회의, 학술지를 위해 비판 등 좀 더 아카데믹한 활동에 전념한다.
아카데믹화의 과정에서 정치적 의제를 공개적으로 내세웠던 비판자들은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민중을 위한 과학’에는 날카로운 과학 비판 글들이 많았으나 학술적인 과학분석에서 이들을 인용하는 예는 극히 드물었는데, 이는 이러한 학술지들이 정치적이며 그렇기에 학술적인 출판물로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만 해도 좌파 비판자들의 의견이 어느정도 받아들여지기는 했으며 과학분석가들도 이들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러나 좌파 비판자들이 점차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면서 자이먼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이 이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콜린스는 과학사회학을 사상의 역사, 학문적 전통의 역사로 제시했으며 이것이 동시에 사회운동의 역사이자 계급, 성, 인종투쟁의 역사일 수 있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과학사회학자들은 대부분 과학자사회 ‘내적’인 것들에 집중했으며 ‘외적’인 대중 논쟁 등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사회를 위한 과학운동으로부터의 기원에 대한 인식 결여는 학자들이 과학 비판을 전문직업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으며 과학의 영향을 다루는 현장 과학자나 활동가들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하는 과정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과학사회학의 한 분야인 과학정책을 생각해 보자. 정책이란 일반적으로 정부 내지는 산업계에 의한 의사결정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책 연구자는 정부나 산업계로부터 대규모의 계약과 자문 등의 좋은 기반을 갖는다. 과학정책 연구자가 자기 분야에서 근본적인 가정에 대해 비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이는 어느정도 그들의 연구자금과 지위의 원천이 이러한 가정에 근거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운동그룹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이들의 행위는 “과학정책”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이들과 함께 작업하면 사회적 지위나 연구자금을 얻기가 대단히 어려워진다. 더불어 지역운동 그룹에 관여하는 것은 학계에서 정치적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정부나 산업계의 정책과 연관을 맺든, 사회 운동가들과 연관을 맺든 모두 사회적 참여라는 것은 동일하나 이 둘에 대한 시선은 전혀 달라지게 된다.

    다시 학계로 눈을 돌려 보면, 과학사회학의 연구를 통해 논문을 발표하거나 책을 쓰고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며 학술회의에 참석하는 등, 학자 자신에게는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가 사회운동을 하는 이에게 어떠한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오히려 과학사회학의 아카데믹화는 과학사회학과 사회운동가들 사이에 벽을 만들었으며 이 둘 사이의 거리를 멀게 하였다. 실제로 운동가들과 이야기 해보면 이들은 과학사회학의 학게적 연구에 대해 접해본 사실이 매우 적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전쟁: 세계 과학자의 ¼ 이상이 군사 연구 개발에 종사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이에 대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사회학에서 통찰력 있는 연구라고 일컬어지는 메켄지의 연구는 핵미사일의 정확도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논하고 있는데, 그의 연구가 반전평화운동에서 시작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이 연구가 어떻게 활동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2. 억압: 세계 많은 국가 정부는 반정부 체제에 대한 탄압을 서슴치 않고 있으며 이에 과학기술도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과학사회학에서 이 영역은 무시되고 있다.
    3. 빈곤과 불평등: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은 그 어느 때보바도 부와 분배를 둘러싼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는 데 있어 과학기술이 수행하는 역할을 과학사회학에서 어느 정도 다루고 있는가?
    4. 가부장제: 페미니스트 비판이 높아지고 있지만 과학사회학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과학사회학의 주요 인물이 모두 남성이라는 것은 어떤가?
    5. 환경과 보건: 이 영역은 상대적으로 과학비판이 많다. 이는 사회운동이 이를 주목받을 만한 영역으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다른 주제들에 비해 이 영역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이유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과학사회학자들이 활동가들의 영역에 도움이 되는 직접적인 연구를 수행함과 동시에 또 하나의 영역이 있는데 이는 바로 교육이다. 교육은 간접적이긴 하지만 광범위하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다. 많은 학자들이 학생들을 가르침으로써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들은 전통 과학 교과서에서 벗어난 과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공한다. 학생 중 상당수는 기득권 세력에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과 관련이 있으며 이에 적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데, 과학사회학 교육이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론가들은 날카로운 통찰을 통해 진보적 사회 변화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분석을 해내려 하며, 아카데믹한 이론가들은 사회에 대한 이해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분석을 해내려 하는데 이들의 목표는 모두 모호하다는 공통점을 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론과 실천간의 관계를 잘못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로즈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급진적이었지만 인식론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노선을 견지했다. 그는 사회생물학이 나쁜 정치학이면서 나쁜 생물학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과학사회학자들은 이러한 형태의 분석을 거부했는데, ‘나쁜’과학이나 ‘좋은’과학이나 모두 분석을 필요로 하며 연구를 함에 있어서 논쟁의 어느 한 편에 가담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Strong program’에서는 이러한 점을 강조했으며 논쟁 위에서 모두를 내려다 보는 위치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정했다. 반면 ‘week program’은 이를 넘어서려는 시도였는데 이들은 이론가들의 역할을 제시하는 데에 약점을 드러내었다.

    이론적 모색에 내재한 결함은 분석의 기반이 오직 관념에만 기반해 정초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분석은 실천에 의존해야만 한다. 학자들의 분석은 대체로 전문적 지위 상승과 학문적 이론화의 실천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분석이 사회문제에 유용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실천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모든 분석은 사실상 개입을 의미하는데, 어떻게 개입하느냐보다는 어떤 종류의 개입을 누구를 대상으로 수행하며 누가 이득을 보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과학사회학은 사회운동과 밀접한 연결을 맺고 출발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론화되어 학계에 고정되고 활동가들과 분리되었다. 정치학이 정부에 대한 연구가 되고 경제학이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가 된 것처럼 과학사회학도 현재 사회에 봉사하는 과학에 대한 연구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 초기의 급진적 과학 비판에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전망이 있었고 ‘과학-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그 곳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요소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정책’은 사회 구조 내부의 작동과정을 개선해서 사회를 개혁하려 하고 있다. 심지어 과학사회학에는 이러한 사회적 목표마저 결여되었다. 그러나 과학사회학 이론과 실천에는 지배권력과 더불어 사회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여전히 논쟁적이다.

    과학사회학 이론가들은 실천에 힘을 싣기 위해 다음의 사항을 주시해야 한다. 먼저 사람들과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지적인 흥미’보다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 사항을 찾아내어 연구한다. 그리고 보다 쉽게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론가와 활동가의 분리는 학계의 아카데믹한 글쓰기에도 연관이 있다. 더불어 현장 과학자나 활동가들이 직접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글을 쓰도록 해야 한다. 또한, 과학사회학 저널과 더불어 현장 과학자들의 저널에도 글을 쓰려고 노력하라. 논쟁 중인 영역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거나 쟁점을 만들려는 목적으로 특정 영역을 연구해야 한다. ‘행동 연구’에 착수하여 사회적인 목표나 수단을 지적인 목표와 수단과 통합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운동 그룹에 참여하여 다른 이들과 협력하여 연구를 진행되는 활동이나 새로운 활동의 개발에 적용하도록 한다. 이러한 제안은 지배권력 뿐 아니라 비권력 층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행동들이다. 이론적 정교화 보다는 누구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의 선택이 결정적인 문제다.


* Brian Martin의 원문글(번역본): http://walker71.com.ne.kr/bmartin.htm


by jewel | 2009/06/20 19:04 | └ speak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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