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를 보내지마]
가즈오 이시구로 저/ 김남주 역
민음사, 2009

리뷰에 앞서 본 도서를 읽을 분들께, 개인적으로 본 책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 없이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도서 소개란을 좀 보다가 내용과 배경을 알게 되었는데 전 읽는 내내 신경 쓰여서 집중이 안되더라구요. 내용을 미리 안다고 해서 재미가 삭감될 반전은 없지만, 아무래도 관련 영화의 내용이 (소재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떠 올라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쪽으로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왕이면 도서 관련 키워드도 모른 채 시작하시길... 더불어 역자 후기를 보니 본 소설이 SF로 분류되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전혀 SF적이진 않습니다. :)

그럼, 리뷰 시작.

본 도서를 소개하는 핵심 키워드는 '복제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명체에는 창조의 근원에 관계 없이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 그런데 책 속의 등장 인물들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들은 '인간'이 아플 때 그들에게 장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처음엔 이러한 키워드에서 영화 <아일랜드>가 떠올라 책 자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정확히 자신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렴풋이 존재를 자각하고는 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복제인간이며, 장래희망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어른이 되어도 하나의 직업만 가진채, 결국 다른 이의 '기증자'가 될거라고, 어디에서 들은 적은 없지만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책 내내 한 번도 정확하게 언급되지는 않는데, 특히 그들의 어린 시절을 보내는 헤일셤(책의 1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읽는 내내,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탈출을 시도하지는 않을런지 내심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 책은 액션도 스릴러도 추리물도 아니다. 그들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그런 책이다.

<아일랜드>의 끈을 놓은 이후(책의 2부), 나는 또 다른 이유로 그들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들은 나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나와 다른 존재자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나의 흥미를 끌 수 있겠는가.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받아야 하는 느낌은 뭘까 고민했다. 이들에 감정이입은 전혀 되지 않고, 그렇다고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 아님 아직 실현되지 않은 과학기술에 대해 지금부터 적대감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이 작가는 대체 무슨 얘기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다가 후반부에서(책의 3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정말 나와 다른가? 비록 복제인간이라고 전제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른채 길러지다가 세상에 나가서 현실과 만나고,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루스가 그들의 근원자로 언급했던 사회의 하층 계급, 그들이 결국 복제인간의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당장 우리 주변에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신약 테스트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있다. 비록 장기 기증은 아니지만,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신체 기증이며 특정 계층에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인류학자 Sunder Rajan 교수는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약 테스트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로 인도인들이 기꺼이 실험 대상을 자처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국제법과 글로벌 제약회사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는 의약 기술과 연결된 자본주의의 형태라며 이에 대해 꼬집고 있다 (Sunder Rajan, Biocapital, 2006). 혹은 얼마 전 들었던 '구글아기'도 하나의 형태가 아닐까. 인터넷으로 아기를 주문하고 정자와 난자를 제공하면 누군가가(주로 제 3세계) 대리모가 되어 아이를 낳고 이 아기가 집으로 배달되어 온다고 한다. 이 때의 대리모가 루스, 토미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소설의 '인간'들은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서, 복제인간이 '인간'과 같지 않다는 것에 위안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복제인간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믿음에서 모든 행위들이 묵인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16세기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살던 원주민들을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로 보았기에 착취가 가능했던 것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믿는 지금에도 여전히 계층 간 서로 다른 인식이 작용하고 있다. 새로운 착취 계층은 요즘 시대의 복제인간이 아닐까.

잠시 언급했지만, 소설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은 영혼이며, 에밀리 선생님 등은 '비인간'도 영혼이 있음을 '인간'들에게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그들조차 캐시와 토미를 두려움 없이 보지 못하는 것은 진정한 존중인지 혹은 동정인지 애매한 면이 있다. 한편, '비인간'들 사이에는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면 집행 유예 기간을 얻을 수 있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집행 유예 기간이 그들에게 진정으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간인 것이다. 마치 나무인형 피노키오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처럼 그들은 '인간'이 되기 위해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토미는 사랑의 증표로 화랑에 걸린 작품에서 보여지는 참된 영혼 가설을 내놓는다. 비록 그들이 사랑을 통해 인간이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토미의 가설이 맞았다는 점에서, 영혼과 사랑에는 연결고리가 있다. 우리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에 의해 창조된 그들에겐 어떠한 영혼이 존재하는가? 자칫 종교의 덫에 걸릴 수 있는 물음을 작가는 교묘히 빠져 나가면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여태까지의 리뷰는 작가가 의도치 않았던 나만의 해석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경험과 상태에 따라서 상황을 판단하며 서로 다른 감상을 얻는다. 캐시가 오래된 노래를 듣고 아이를 갖을 수 없는 여자가 아이를 얻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눈물 지었던 것처럼, 그리고 마담이 캐시의 눈물을 보고 복제인간의 아픔을 떠올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슬퍼했던 것처럼. 사실 소설은 굉장히 덤덤하고 밋밋하며, 얼핏 캐시의 성장소설 같은 느낌도 준다. 게다가 설정을 빼고는 SF적인 요소도 전혀 없다. 현실과 미묘하게 다른 듯 닮은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문학의 성찰성이고 이 점이 클수록 작가의 힘이 커진다. 그런 점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부드러우면서 큰 힘을 가진 작가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소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었을까도 궁금해진다.




렛츠리뷰

by jewel | 2010/01/05 18:28 | └ read | 트랙백 | 핑백(1)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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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wandering the or.. at 2010/01/07 11:50

... &lt;나를 보내지마&gt; - 렛츠 리뷰 당첨 도서. SF 소설이라고 소개되었지만, 소설 자체에서 그런 느낌은 거의 받을 수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리뷰 참조.문학 쪽은 거의 못읽고, 역시 리포트 기간이라 보고서용 도서들을 잔뜩 읽었다.그나저나 11월에 사회조직 연구에 올인했던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네; ... more

Commented by 지성의 전당 at 2018/10/12 16:14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영혼이라는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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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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