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5일
소심한, 아니, 신중한 다윈씨

지금으로부터 딱 200년 전에 유명하디 유명한 다윈이 태어났고, 딱 150년 전에 진짜 유명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가 세상에 나왔다.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 군도를 돌아 보면서, 비슷한 듯 다른 수많은 새들이 무려 같은 종임에도 불구하고 차이를 보이는 이유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진화론이 나왔다. 그러나 비글호 항해와 <종의 기원>의 출판에는 꽤 긴 시간의 장벽이 있는데 역사가들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했다.
의사집안에서 태어난 다윈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의대에 보내졌는데, 당시에는 마취 기술이 없던 시절이라, 고통 속에서 수술받는 환자들을 보고 기겁을 했다. 또, 비참한 생활을 하는 노예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신학 교육을 받은 다윈은 피츠로이 선장을 따라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로 여행을 떠난다. 5년 간의 항해에서 본 것들을 기록하고 수집품을 온갖 과학자들에 보냈는데, 이 때에 요상한 이론에 꽂히게 된다. 같은 종임에도 섬마다 전혀 다른 형태를 띈 새 (핀치)들은 대체 왜 저러한 걸까? 신께서 각 섬마다 다른 새를 창조하신 걸까? 왠지 그런 일을 하기엔 너무 귀찮을 거 같은데... 비록 비글호 항해에서 진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긴 했지만, 사실 다윈의 아이디어는 아직 체계화 하기에는 너무 미미했다.
항해 후, 다윈은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게다가 종의 변형론은 창조주 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무시무시한 짓이 아닌가. 정말 신중해야 했다. 자신의 생각을 섣불리 밝혔다가는 유물론자로 오해 받기 쉽상이었다. 더불어 탄탄하지 못한 논리로 주장을 내세웠다가는 오히려 사람들의 반발을 사서 진화론이 자칫 신비주의에 파묻힐 수 있었다.
놀랍게도,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지형은 급변하지 않고 오랜 시간 서서히 변한다는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와 '멜서스'의 <인구론>이었는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에 식량은 산술급수로 증가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식량 부족 사태를 겪고 인구 수가 조정이 될 거라는 맥락의 글에서 '생존 경쟁'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다. 기린을 예를 들어 생각해 보면, 기린의 개체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어느 순간 식량이 부족한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때, 유난히 목이 긴 기린이 있다면, 좀 더 높이 위치한 나뭇잎도 따먹을 수 있기에 생존에 유리할 것이고 살아남아 후손을 이어갈 수 있다. 환경의 영향에 따라서 특정 개체가 선택적으로 살아 남는다는 '자연 선택'의 토대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한편, 다윈은 '자연 선택' 이전에 '인공 선택'의 개념을 먼저 떠올렸는데, 인간이 말을 키우는데, 만약 경마를 위해 말을 키운다면 분명히 건강하고 잘 달리는 말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은 종마를 얻기 위해 품종 좋은 경주마들끼리 교배를 통해 후손을 얻을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특정 성질을 가진 개체가 인공적으로 선택되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같은 종이었더라도 지역적 특성(환경)에 따라 자연적으로 선택된 개체들이 대를 이어 나가다 보니 섬마다 전혀 다른 생김새의 새들이 나타나는 것이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얼핏 보면 다윈의 진화론은 다윈의 비글호 항해 이후 짧은 시기에 나왔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 점은 어느 정도에서는 맞았으나, 다윈은 좀 더 신중하기를 원했고 몇번이고 확인해 보고 싶어했다. 비교적 급진적인 이론이 사람들에게 좀 더 잘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해 이론적 보완과 함께 여러가지 경험적 관찰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아주 두꺼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다윈의 이러한 스타일은 따개비 연구에서도 보여지는데, 스스로도 짧은 시간에 끝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따개비 연구는 무려 8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시기에 어렸던 다윈의 아들은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 아버지를 보고 놀라 물었던 말이 "너희 아버지 따개비는 어디 있니?"였다는 걸 보면 그가 얼마나 연구에 심취하는 지 알 수 있다.
두꺼운 책을 쓰던 다윈은 갑자기 요약본으로 전환하여 <종의 기원>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 '월리스'의 진화론논문이다. 비교적 젊고 혈기 왕성했으나 (다윈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 과학계에서는 학자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월리스는 다윈과 거의 비슷한 진화론을 독자적으로 수립하였으며 자연 선택의 개념을 그 근거로 두었다 (비록 그가 자연선택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진 않았으나 내용이 다윈과 매우 흡사했다) 아무리 신중한 다윈씨라도,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이 해온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지도 모를 상황에서 고민에 고민을 하던 다윈은 주변 동료들의 제안에 따라 '마지못해' 월리스와 동시 발표를 하게 된다. 과학에서 동시 발견은 흔하지만 대부분이 자신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윈과 월리스의 동시 발견(?)은 비교적 평화롭게 마무리 되었는데, 월리스는 자신의 이론을 대학자 다윈(비록 월리스 자신은 다윈보다 라이엘을 더 높게 보았지만)이 인정한 것에 매우 기뻐했고, 다윈은 공동 발표나마 젊은 학자를 밟지 않고 자신과 함께 발표하게 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물론 당시 학계에서 크게 인정 받는 다윈이었음을 생각해 보았을 때, 다윈 혼자 단독으로 발표하여 공을 모두 가져갈 수도 있었으나, 다윈은 마음이 여린 '신사'였기에 그러한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연구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었다가(정말로 다짐한 것인지는 미심쩍지만) 동료인 라이엘과 후커가 공동 발표를 권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들에 동의했다.
다윈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고맙게도(?) 다윈은 꽤나 많은 편지를 작성했다. 덕분에 역사학자들은 다윈에 대한 꼼꼼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다윈은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학계에 직접 나서거나 다른 과학자들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렸는데, 작은 논쟁이라도 벌어지면 머리 속이 빙빙 돌고 구토가 날 것만 같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언쟁을 싫어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세계 각지의 연구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 달라고 갖가지 부탁을 할 정도였던 걸로 보아서는 내심 얼굴은 두꺼운 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난 심포지움에서 장대익 교수님은 다윈이 지금 세대를 살아간다면 진정한 인터넷 인간이 아닐까 생각하신다는데, 정말 딱 맞는 표현이다. 언제나 자신의 건강에 대해 걱정했던 다윈은 (그가 자주 아팠던 건 사실인 듯하나, 그러한 이야기를 일기와 편지에 계속 표현하고 있으니 엄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신중하고 사려깊은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의 성과를 가로채는 것을 매우 싫어한 신사였다.
혈액형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굳이 보자면, 다윈은 A형이 아니었을까 싶다.
참고문헌
1. 데이비드 쾀맨 저, 이한음 역, 신중한 다윈씨 (승산, 2008)
2. 피터 보울러, 이완 모러스 저, 김봉국, 홍성욱 역, 현대과학의 풍경 (궁리, 2008), 6장 다윈혁명.
3. M. Ruse, R.J. Richards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Origin of Species (Cambridge, 2009), ch.1.
* 사진 출처: http://www.sciencehumor.org/2008/photoshop-darwin-charles/ (구글 이미지 검색 "darwin")
# by | 2009/10/25 20:51 | 살롱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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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다윈씨는 꼭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성영 결혼식에라도 얼굴 보면 좋을텐데~ 한국 오면 애들한테 콜 함 날리셔~